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내 ‘자살률 1위 국가 대한민국.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도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자살 위험도는 일반인들보다 높고, 우울증이나 수면장애 문제는 2배 가까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를 터놓고 말하거나 치료하기 어렵도록 하는 우리 사회의 특징이 창업자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는데요. 어쩌면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건 거액의 투자유치보다 자신과 조직부터 더 건강하게 돌볼 수 있는 마음이었을지 모릅니다. 같은 스타트업으로서, 제네시스랩이 자사의 AI 멘탈케어 앱 ‘닥터리슨(Dr.Listen)’을 창업자들에게 값없이 내놓은 이유입니다.
그들의 ‘정신건강’이 위험하다
스타트업 창업자 21% = ‘자살 고위험군’
제네시스랩은 최근 ESG·임팩트투자사 ‘한국사회투자’와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정신건강 관리 지원 내용이 포함된 업무협약(MOU)을 맺었습니다. 골자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에게 닥터리슨을 무료로 제공하는 건데요. 창업자들의 정신건강 관리, 왜 중요할까요? 스타트업은 대개 번뜩이는 사업 아이디어와 특출한 소수 인재들의 의기투합해 만들어집니다. 또한 모두가 드라마틱한 성공과 ‘유니콘’ 기업으로의 도약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죠.
2023년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창업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스타트업 수는 무려 300만개 이상입니다. 그런데 그중 정부 지원으로 창업한 곳은 고작 6% 미만이고, 90% 이상은 자기자본으로 창업한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이 말은 스타트업 열의 아홉은 창업과 동시에 자기 주머니를 기약 없이 태우는 생존 전쟁에 놓인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회사의 성장이 기대보다 늦어질수록 인재들은 하나둘 회사를 떠나기 마련입니다. 그 대부분의 부담과 압박감은 쉽게 떠날 수조차 없는 창업자의 몫이 되고요. 게다가 2022년 이래 본격화된 ‘스타트업 투자 가뭄’ 현상도 아직 진행형인 가운데, 여전히 자립이 어려운 스타트업들의 운영 부담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실제로 2022년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과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이 진행한 ‘스타트업 창업자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에서도 창업가들의 우울과 불안, 자살 위험도는 일반인 대비 크게 높았습니다. 가장 극단적 상태인 자살 위험성은 조사대상 5명 중 1명꼴(21%)이 ‘고위험군’이었는데요. 주요 스트레스 요인은 ▲자금압박(44.6%) ▲조직관리·인간관계(20.33%) ▲실적부진(19.6%) 등 모두 회사의 존속과 직결되지만 마음처럼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체면 지키다 골병드는 마음
문제는 이런 마음의 병을 외부에 터놓거나 진단해 볼 기회조차 부족한 현실입니다. DD테크콘텐츠랩은 얼마 전 닥터리슨을 개발한 제네시스랩의 유대훈 CAIO(최고 AI기술 책임자)를 만나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요. 그중 일부를 전해드립니다.
‘체면‘이란 말은 한국에만 있다는 걸 아시나요? 체면은 타인에게 나의 좋지 못한 면을 숨기고 싶어하는 습성이기도 한데요. 가령 유럽에선 정신이 불안해 보이는 사람에게 ‘혹시 너 자살을 생각하는 거야?’하고 바로 질문하고, 그게 확인되면 의사한테 데려가는 선택지가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어요. 반면 우리나라는 체면상 그런 생각을 타인에게 말하기도, 물어보기도 어려운 문화에요. 그러다 보니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돌려 말하거나 격려나 조언을 택하는 식으로 상태를 악화시키고 치료의 때를 놓치는 안타까운 현실이죠.
보통 우울감이 있어야 우울증이라고 하죠. 그런데 최근 2주 사이 내가 좋아하던 일에 흥미가 사라지거나,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면 그것도 우울증의 한 증상일 수 있거든요. 게다가 우울증은 뇌 안의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 이상, 생체리듬 변화에도 영향을 받아요. 스스로 극복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죠.
회사를 예로 들어볼까요? 가령 한 팀원의 성과 지표가 갑자기 떨어졌어요. 그게 계속 지속돼요. 그러면 보통 ‘OO님, 예전에는 잘했잖아요, 지금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식으로 위로나 조언을 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하지만 그 팀원이 만약 우울증이었다면 그건 가장 피해야 할 말이에요. 우울증 환자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아, 내 문제구나’ 자책하면서 상태가 더욱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죠.
‘남다른’ 닥터리슨
전인적 마음 자가평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음이 힘들어도 체면상 내색하기 어렵고, 팀원이 마음 상할까 예의를 차려 말했던 것들도 사실은 그를 더 병들게 하는 일이었다니요. 그러나 뿌리 깊게 이어져 온 한국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생각하면 이 문제가 단기간에 개선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차선은? 개인이라도 먼저 자신의 정신건강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는 일입니다. 적어도 아픈지 몰라서, 누구도 말해주지 않아서 방치되는 상황은 모면해야 하니까요. 또한 창업자로서 사업수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로 자신과 구성원, 회사의 미래까지 망가지는 일만큼은 막아야 할 것입니다.
제네시스랩이 서울대학교병원과 공동연구개발 협약을 맺고 만든 닥터리슨은 이 문제들의 해결을 돕는 마중물로서의 역할이 기대되는 서비스입니다. 당장 병원에 가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휴대폰 앱으로 언제든 ▲우울증 ▲불안장애 ▲수면장애 ▲강박장애 등 15개 주요 정신질환에 대한 자가평가 및 분석이 가능하죠. 직접 사용해보니 전체 검진에 걸리는 시간은 약 30분 내외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도 좋은 수준이었습니다. 또한 자가평가 시작 단계에서 내 상태를 글로 입력하면 내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검사를 맞춤형으로 추천해주기도 합니다.
처음엔 병원에서 흔히 보는 문진표와 비슷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차이점을 알 수 있었는데요. 보통 현재 상태만 체크하는 문진들과 달리 닥터리슨은 특정 문제요인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영향을 함께 알아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신체적, 사회적 영향도 함께 분석하죠. 마음의 병이란 정신 상태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라 간과하기 쉬운 신체적, 사회적 영향들도 광범위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기 위한 ‘전인적(Holistic)’ 접근 방식입니다. 이를테면 우울 진단 중 특정 요인이 있을 경우 정도 체크에서 나아가 ▲해당 요인이 사회적·직업적 활동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대인관계에는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보다 세밀하게 체크하는 거죠.
다 같은 우울증이 아냐
사용자가 자신의 정신건강 상태별 단계를 명확히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 점도 두드러지는 특징입니다. 닥터리슨 개발에 참여한 서울대병원 전문의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이 단계 구분의 중요성을 간과한다고 하는데요.
예컨대 대중에 널리 알려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는 충격적인 사건 후 겪는 신체적, 정신적 어려움의 기간에 따라 ‘급성 스트레스 장애’와 ‘PTSD’로 구분되며, 두 장애는 치료법과 접근방식이 다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나는 PTSD니까 그럴 수 있어’라고 뭉뚱그려 대응하다보면 적절한 병원 진료를 받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우울증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요우울삽화’가 있는 우울증 진단 이전에 ‘조증·경조증 삽화’가 있는지도 반드시 체크해야 합니다. 조증이란 평소와 달리 기분이 매우 좋고 고양된 상태인데요. 우울 증상이 크더라도 과거 조증 또는 경조증 증상이 있었을 경우 ‘양극성 장애’에 해당하므로 단순 우울증과는 치료법을 달리 해야 합니다. 닥터리슨은 이런 점에 착안해 과거와 현재의 우울, 조증, 경조증 상태를 종합적으로 확인해 보다 정확한 분석을 제공합니다.
나아가 일회성 확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건강검진을 주기적으로 받듯 모바일 앱인 닥터리슨을 이용하면 언제든 누구에게 보일 필요 없이 시간에도 구애받지 않고 주기적인 자가평가로 자신의 마음건강 상태 변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전 자가평가 결과가 수치로 기록되므로 상태변화의 추이 판단도 쉽고요. 매일의 상태에 대한 간단한 메모도 남겨둘 수 있습니다.
다만 정신건강과 관련된 민감 정보를 외부에 기록하는 것이 꺼림칙할 수도 있는데요. 이 점에 대해 제네시스랩은 자가평가에 참여한 사용자의 주요 데이터는 암호화 처리되므로, 사용자의 평가 정보도 보호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외에도 치료를 결심했을 때 보다 손쉽게 상담,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현재 위치와 가까운 병원과 정신건강복지센터, 자살예방서비스 기관 등을 지도에 안내해주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면 제시간에 통화로 알람을 울려주는 ‘복약 관리’ 기능도 제공됩니다.
다만 이 앱은 진단도구가 아니라 ‘자가평가 도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네시스랩도 ‘본 평가는 의사의 진료를 대신하지 못한다’, ‘상담이나 진료를 받을 예정이었다면 연기하거나 취소하지 말라’고 강조하는데요.
애초에 닥터리슨 서비스 개발 취지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신건강 상태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만성화 전 초기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닥터리슨 사용자가 실제 치료를 시작했을 때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더욱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닥터리슨의 본질적 개발 취지와 기대 효과 중 하나라고 합니다.
선한 영향력을 사회로
당장의 매출보다 중요한 가치
한편 유대훈 CAIO는 닥터리슨 개발 과정에서 약 1년간 매주 1회 이상 퇴근 후 서울대병원 전문의와 만나 늦은 시간까지 함께 모델을 설계했다고 합니다. 현재 제네시스랩의 핵심 서비스와 캐시카우는 AI 면접 솔루션 ‘뷰인터 HR’이지만 닥터리슨 개발에도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던 거죠. 하지만 이를 통해 당장 돈을 벌기보단 사회적으로 좋은 곳에 먼저 쓰여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네시스랩은 닥터리슨 출시 첫해인 2023년부터 ▲층간소음 피해 시민 모임 ▲전국 특수 교사 노조 ▲소방가족 희망나눔 재단 등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비영리 단체들에게 닥터리슨 이용권을 무상 제공했는데요. 이영복 제네시스랩 대표는 이번 한국사회투자와의 협력을 발표하면서 “AI 기술이 인류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력을 염두에 두고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제품을 제공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사람’에 대한 관심과 상호간 선한 영향력 행사를 통한 ‘공동의 성장’은 제네시스랩의 조직적 DNA이기도 합니다. 제네시스랩 스토리팩 인재편, 조직편 등에서도 그런 가치관들이 잘 드러났죠.
스타트업 ‘상생’ 실현하는 스타트업
특히 이번 스타트업 창업자 대상의 닥터리슨 기부는 앞선 비영리단체 기부와 또 다른 결이 있습니다. ‘층간소음 피해시민 모임’ 등은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도우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합니다. 하지만 치열한 생존 경쟁 현장에서 살아가는 스타트업이 다른 스타트업을 돕는다는 발상은 사실 그리 흔히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네시스랩 입장에선 그들을 낙오시켜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같은 고민과 목표를 두고 분투하는 동료로 바라봤기에 결정할 수 있었던 일일 겁니다.
나아가 정부도 국민 모두의 멘탈케어 측면에서 더욱 폭넓은 고민을 함께할 필요가 보였습니다. 보건복지부가 2021년 발표한 제2차 정신건강복지기본계획(2021~2025)에 따르면 국내 정신질환 유병자 중 절반에 해당하는 48.7%가 스스로 자신의 정신질환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는데요. 어떤 병이든 가급적 빠른 발견과 치료가 중요한 법입니다. 그만큼 정부가 사후 상담이나 치료 지원에 집중하기보단 다양한 정신질환 검진 서비스 발굴 및 배포 지원에도 더욱 힘을 보탰으면 하는 바람입니다.